얼마 전 오래 연락 못하고 지낸 분의 부고를 들었다. 예전 부산 정도사님의 유일한 제자로 사주 쪽보다는 관상으로 한 세기를 풍미하신 강남 쪽에서 이선생 또는 이도사라고 불리던 분이다. 올해 연세가 아흔 가까이시니.. 사실 필자가 이분을 처음 봤을 땐 정도사님이나 이분이나 그냥 할아버지였다. 이분이 제대로 된 제자가 없었던 정도사님의 제자가 된 건 눈썰미가 너무 좋아서 였다. 한번 본 사람은 다 기억하셨는데 얼굴을 그려낼 정도였다. 예전에는 사주를 보러 가면 밖에 서기가 앉아서 접수를 받고 물이나 차를 내오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이 분의 원래 역할은 차 심부름이었다. 서기는 보통 사주를 배우러 오는 사람으로 거의 무급이었지만 심부름하는 분들은 월급을 받았는데, 이분은 심부름 꾼이라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셨다. 정도사님은 이 분이 일을 너무 잘하고 싹싹해서 글자만 때면 서기를 시켜려고 하셨다는데 사람 얼굴은 그렇게 잘 알아보면서도 글자를 잘 못 배우더란다. 하지만 이 분은 자신의 눈썰미만으로 시간 내어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진짜 어깨너머로 관상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이 분에게 관상을 어떻게 배웠냐고 물으니.. 참 재미있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철학관에 처음 왔을 때 자기 앞에 사주를 배우겠다고 일본에서 대학 졸업한 서기까지 3명이나 있었단다. 다 무급이었는데 자신은 사주 배울 생각도 없고 꼭 돈 벌어야 한다고 사정해서 유급 심부름꾼으로 뽑혔단다. 그런데 정도사님은 문 여는 시간부터 문 닫는 시간까지 계속해서 손님이 줄을 이어서 제자들을 두고도 사주든 관상이든 가르칠 시간이 없었단다. 특히나 마칠 즈음인 밤이 되면 목소리가 쉬어서 묻고 싶은 게 있어도 못 물어볼 분위기였단다. 제자가 없어서 없는 게 아니고 정말 시간이 없어서 제자를 만들지 못했다는 거다. 그런데 자신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도사님과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건 정도사님이 아침마다 목욕탕에 가는 걸 알아낸 것이다. 정도사님도 그걸 공부하는 거라 말씀하셨다는데.. 사실 관상은 얼굴만 봐서는 제대로 그 사람을 알 수 없다. 필자도 관상이라 하면 필자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거라 자부하지만 얼굴만 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 단정 짓지는 않는다. 이유는 관상에서의 상은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 시장에서 소를 살 때를 생각하면 된다. 단지 소의 이빨만 보고 소를 고르는 게 아니라 소의 전체를 보지 않나? 사람도 마찬가지다. 얼굴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몸 전체, 특히나 뼈와 그 외 부분의 조화를 함께 봐야 한다. 이 이도사님은 그걸 목욕탕을 따라 다니면서 배운 것이다. 정도사님이 다니던 목욕탕은 부산 조방앞에서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찾는 곳이었다. 목욕탕 중앙의 온탕에 앉아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관상을 40년 가까이 보셨다고 한다. 새벽 목욕탕의 풍경을 모르실까 봐 말씀드리면 몰라도 인사를 나누고 서로 때도 밀어주고 했었다. 그래서 친밀한 정도는 아니지만 뭐하고 사는지 정도는 서로 아는 사이였다. 필자가 사주를 안 지 30년 가까이 되니 30년 전 20년 전 10년 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소식을 들으면서 내가 아는 게 맞는지, 뭐가 틀렸는지를 알아가고 있는데.. 40년이면 어떻겠나? 참고로 조방앞이란 곳은 부산 동구와 진구 일대로 부산진(부산진역, 예전엔 부산역보다 더 메인 역할을 수행한 부산역 직전에 있는 기차역), 조방앞, 서면이 중심으로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금융과 교통, 상업의 중심으로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독재에 의해 문을 닫은 동명목재나 국제상사 등이 남아 있었다면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했을 것이다. 지금 문현 금융단지를 그 자리에 만든 이유도 필자의 생각에는 이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도사님이 10년이상 목욕탕을 따라다니면서 말이 통하게 되자 박도사님이 시킨 중책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건 바로 문을 가리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정도사님은 사주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제대로 관상을 보기 위해 탈의를 시키기도 했는데 여자분들이 탈의를 할 땐 문을 잠그긴 했지만 창호지 문이라 흠이 난 곳도 있고 또 누가 뚫고 볼 수도 있으므로 천을 들고 문을 가리게 했단다. 요즘 같았음 그냥 커튼 하나 달았을 텐데.. 덕분에 이런 기회가 있었던 거다..ㅎ 그때 실제로 정도사님이 실관 하는 걸 듣고 새벽에 목욕탕 가서 묻고 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관상을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호기심에 물었던 게 하나 있는데.. 정도사님은 그걸 어디서 배웠답니까? 하니.. 옛날엔 치마저고리만 풀면 되기에 보여주기 쉬웠고, 옛날 사람들은 원래 관상을 본다 하면 몸까지 보여주는 걸로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 조선시대 때에는 정부기관인 관상감이 중전 간택 시에 체상까지 봤다고 전해지고, 과거 자료를 보면 여자가 가슴을 드러내고 다니는 그림이나 사진이 흔히 보이는 걸 보면 현재와 달리 과거에는 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몸을 가리는 기준이 달랐던 것 같다. 필자가 항상 관상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건 현재에는 체상까지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보여주겠나? 안 보고 봐주는 사람도 있다고? 관상으로 유명하다는 사람들의 폐해는 많이 듣고 있다. 딱 그 정도밖에 못보고 무리하다가 폐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경우에는 사주팔자에 면상만을 추가로 보는 방식을 택한다. 특히나 관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눈빛과 혈색, 살집인데.. 이벤트적으로 일어나는 신상에 관계된 일은 사진이라도 봐야 제대로 상담을 해줄 수 있기에 문자로 묻는 분들에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할 때도 있다. 물론 남자 CEO분들은 같이 사우나를 가기도 하기에 체상까지 고려한 감명이 가능하다. 체상까지 고려했을 때 어떤 정밀도가 있는가.. 궁금하실 것이다. 재산, 건강, 대인관계, 이성관계, 출산 등을 더 디테일하게 알 수 있다. 여자분들의 경우 이 부분을 면상과 질문 답변을 통해 커버해서 상담하는 것이다. 이도사님은 필자에게 이런 부분을 알려주신 분이다. 대신에 한동안 자신의 주요 고객의 사주를 필자가 알려줬었다. 그래서 우린 스승, 제자가 아닌 동업자의 관계였다. 이도사님과 연락이 끊어진지는 10년 가까이 된 듯하다. 아주 친하게 지내던 지인에게 송사를 당하고 나서부터 였다. 이 분은 역삼에 계시면서 VVIP급만 고객으로 두고 업을 하셨는데,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자식을 자신의 고객회사에 부탁하면서 500만 원을 준걸 돌려달라고 소송을 시작하면서 정신적으로 무너지셨다. 이분의 감명 비가 300만 원이었는데 이 지인이 자신의 온 집안사람들을 다 데리고 와서 관상을 보고는 낸 돈이 500이었단다. 그런데 소개를 해줬으나 취업이 제대로 되지 않자 그걸 돌려달라고 형사 고발한 것이다. 돈은 바로 돌려줬지만 이 지인은 국세청에 고발한다, 어디에 고발한다면서 계속해서 협박을 했고, 체상을 본 것도 이상하게 엮어서 고발한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 협박 내용으로 고발을 해서 구속을 시키기까지 했단다. 그러자 그 와이프가 와서 하도 사정해서 선처를 통해 풀어줬더니 다시 협박을 계속하더란다. 그 후로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으시고는 기력을 많이 잃으셨다. 마음의 상처를 받은 이유는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없음 때문이었다. 사람을 너무 오래 두고 보니 그런 면이 있었던걸 처음에 몰랐던 게 아닌데.. 잃어버리고 안보였다고 하셨다. 그 후로 아주 오랜 고객들에게만 컨설팅해주시고 사셨다. 그러니 필자에게 사주를 물을 신규 고객이 없으니 연락이 끊어진 것이다. 얼마 전 이도사님의 고객이셨던 한 회장님이 필자를 찾아서 통화했다가 이도사님의 부고를 듣게 됐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정말 관상 실력 하나만큼은 출중하신 분이었는데 참 아쉬웠다. 이분도 역시나 제자를 따로 두지 않았다고 하니 이분의 중요한 관상 관법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차후에 필자가 관상책을 내게 되면 이 분의 관법도 포함시킬 생각이다.

 

 

이도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인컨설팅   이동헌